2025.08.14 [종이, LIFE Relic]의 실험 노트 _1차]
A 실험실 _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모든 종이의 90% 이상을 버리지 않고 가공하여 <LIFE>의 작업 생태계 안에 쌓고 있다. 나와 팀원들은 이것을 ‘종이 괴’라고 부른다. 지난 개인전에서 이 과정을 담은 작은 실험대를 오픈했었는데 이것을 종이가 아닌 시멘트로 이해한 관객들이 많아서 좋았다. 현재의 재료와 미래의 재료가 시각적으로 이질적이지 않고 연결된다는 뜻이니까.
B 실험실 1차_ 2024년 겨울, 파리에 도착해 짐을 풀고 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곳은 물질로서의 종이를 이해하기 위한 실험실이 되었다. 도서관이나 미술관에서 주는 리플렛과 티켓, 마트에서 산 달걀의 패키지나 휴지 심지까지 모두 모았다. 파리 휴지 심지는 물에 넣자마자 2초 만에 녹아버린다. 이렇게 가공을 덜 하고도 문제없는 휴지 심지가 멋졌다. 파리에 온 지 한 달이 지나니 내가 거주한 스튜디오 Gana art 1420호는 매일 새롭게 모인 종이를 찢고 녹이며 수제 종이를 만드는 공방이 되었다. 나는 물질로서의 종이와 재료로서의 종이를 두루 보며 익혔다. 그리고 지역성이 담긴 종이를 찾다가 미디어로서의 종이를 만나 잠시 샛길로 빠져 신나게 작업하다 한국에 돌아갔다.
B 실험실 2차_ 2024년 여름, 겨우내 머물렀던 스튜디오로 다시 돌아와 달라진 햇살의 각도에 따라 책상과 작업 테이블, 선반과 조명등을 다시 세팅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형을 뒤섞어 경계를 흐리고 원초적 생명의 기록으로 보일 드로잉을 연습했다. 파리가 축제의 열기로 가열됨과 동시에 내 손에서도 형상이 구체화되고 드로잉이 익숙해졌다. 드로잉은 피규어 작업을 하는 오랜 제자에게 전달해 반입체 조각의 샘플로 구현했다. 그리고 그 조각은 그대로 한국의 스튜디오로 이동하여 팀원들의 손에서 몰드 작업으로 이어졌다.
A 실험실 N차_ 한국에 돌아온 그해 겨울, 흩어져있던 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2025년 현재까지 373434248번의 고민과 실패, 위축되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완성까지의 프로세스를 예측 가능한 형태로 구축했다. 이번에 처음 프리뷰로 공개되는 LIFE, Relic 시리즈는 동굴에서 발견한 과거의 흔적을 모티프로, 일상 속 삶의 기록에서 호흡하는 생명의 흔적으로 확장된 세계다. 내 작업의 중심 재료인 시멘트가 현재의 시점으로 보는 동시대의 기록이라면, Relic 시리즈는 미래의 시점에서 발견한 인류세 이후로의 전환기 기록이다.
이제 나의 세계 LIFE가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막힌 숨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다. 이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 스케치는 2020년, 본격적인 종이 실험은 2023년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 함께했던 라이프팀(박창웅, 윤가연, 이은혜, 황다연, 한승한)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제 일처럼 고민해 준 그 시간 덕분에 나의 깊은 갈망이 실현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무한한 실험을 상상하며, 계속 나아갈 그 첫 장을 이 노트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