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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1  정기호 선생님의 아틀리에를 다녀왔다. 오늘이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쌓아 올라간 그 수 많은 그림, 조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는 끝없는 삶의 서사가 아직도 여운으로 남는다. 이 여운을 그대로 두고 잠이 들 수는 없을 것 같아 물을 끓여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글을 쓴다. 오늘은 60년대부터 쭉 이어가는 포트폴리오를 펼쳐 보고 왔다. 그 시절의 가난은 재료를 구해야 하고, 끊임없이 배워야만 하는 예술가에게 무엇이었을까. 풍요의 시대를 사는 내가, 이것이 나의 작품 세계라고 펼쳐놓는다 한들 그와 연결될 수 있을까. 벽지를 오려낸 도화지, 미군 부대를 찾아 잔디를 깎으며 버려진 텐트를 주워 만든 캔버스, 남김없이 짜내고 종이처럼 얇아진 물감 튜브에 음각으로 세긴 드로잉. 나는 그 의지 자체로 이미 그려지기 전 작품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한 사람이 휘몰아치는 모든 열망으로 육신의 먹고, 입고, 쉬는 것의 본능을 뛰어넘어 그리는 것을 선택했다면 그 그림은 무엇이 될까. 그 몰입된 에너지를 종이가, 캔버스가 받아낼 수 있었을까. 작가는 그 물질들을 어떻게 달래며 그 위에 그림을 남겼던 것일까. 나는 예전에 이런 것들을 정말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동안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리고 동료 작가이자 아내인 화가 조경석. 조 선생님의 이야기 속 그림의 잔상이 떠나지 않는다. 더 이상 캔버스가 없으니 조 선생님은 자신의 작품을 가져와 이것을 물감으로 덮고 당신 것을 그리라며 건네셨다고 한다. 화가 정기호가 그렇게 하지 못하자, 그의 아내는 직접 자신의 그림에 화이트 칠을 해 깨끗하게 지운 후 다시 건네셨고, 그 위에 그려진 그림으로 한 작품이 남았다. 보이지 않지만 아래는 조경석 화가의 그림이, 그 위에는 정기호 화가의 그림이 그려진 작품이다. 나는 이 상징적인 작품의 잔상을 그대로 두고 잠시 눈을 감아 긴 호흡에 집중한다.

화가 조경석은 남편 정기호 화가의 재능과 가난을 함께 포용했기에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작품 활동을 멈췄다. 나의 감정이 무질서하게 동하며 떠오르는 질문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재료를 원했던 화가 정기호가 차마 동료의 작품을 덮을 수 없었던 마음과 결국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덮었던 화가 조경석의 마음, 그리고 이 삶의 서사를 상징하는 작품의 탄생에 관한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필연적이고 운명적이지 않은가? 이러한 작품의 탄생을 무엇인가가 막을 수 있나?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조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도 느꼈지만, 나는 같은 여자로서 조 선생님의 삶을 그 시절 아내의 삶으로 공감하거나 헤아려보는 등의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조 선생님은 정기호 화가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화가 조경석으로 동료 화가 정기호의 작품을 돌보고 계신다. 조 선생님의 선택은 상대의 재능에 대한 인정, 맑은 논리와 이성, 예술가이기에 볼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는 ‘예술가적 선택’이었다. 이 과정에 ‘희생’이라는 단어는 섞이지 않아야 한다. 남성도 여성도 사라져야 하고 예술가 조경석만 남아야 한다. 내가 만약 어느 좋은 날, 조 선생님께 편지를 쓸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적을 것 같다.

-선생님, 정기호 선생님의 작품은 선생님의 선택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여성으로, 아내로 희생하셨다면 화가 정기호 역시 남편으로 남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이 흔들림 없는 화가이자 예술가셨기 때문에, 화가 정기호 역시 끝까지 예술가로 남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강인하셨나요. 어떻게 그 길을 계속 걸어오셨나요. 삶은 참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이제라도 알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 2022년, 11월 11일. 두 번째 방문 이후, 화가 조경석의 삶을 존경하는 먼 후배 최혜지 올림.

삶은 수많은 생명의 약동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두 분이 만난 것도 놀랍고, 이 두 분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지닌 박인식 선생님이 이 긴 과정에 교집합으로 계신 것도 운명과 같다. 하나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모이는 걸까. 그렇게 많은 에너지가 모인 작품은 어떻게 다시 세상에 펼쳐져 수많은 타인 속에서 그 가치를 꽃 피울까. 나는 아직 삶의 기간이 짧아서 이 모든 것들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가시거리도 짧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평상시 정말 잘 하지 않는 생각인데, 좀 더 ‘오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어떤 이런 삶의 서사, 그 속에서 모인 에너지, 그 에너지가 담긴 작품,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는 방향.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의 순환을 하나의 챕터라도 이해해볼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아! 그것참 놀랍구나.’ ‘그것 봐! 이러한 운명적인 움직임 말이야!’하며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꼭 나의 작품이 아니라더라도 내 주변 동료들의 작품을 오래 봐주고 싶은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조금 더 이해하길 바라는 호기심으로, 더 이렇게 존재하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작품 속 사람들이 그래주길 바라는 것처럼.